소식지 38 201303                                                    홍승의 가브리엘 신부 드림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희생’에 보면 주인공이 죽은 나무를 바닷가에 심으면서 죽은 나무에 삼 년 동안 물을 주어서 꽃을 피우게 했다는 수도승의 전설을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아름답긴 해도 지루했던 이 장면이 요즘 제가 풀어야 할 숙제가 되어 있습니다. 꼭 죽은 나무 같다고 여겨지는 아이 때문입니다. 지난달에 시설 관리인이 아이 둘을 성추행한 사건이 터졌습니다. 국경 쪽에 아동재판이 있어서 하루 밤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와 보니 집 안이 발칵 뒤집혀 있었습니다. 사건의 규모를 파악하기 위해 모든 아이들과 개인면담을 하고나니 두 아이가 연루되었는데 추행정도가 생각보다 심각했습니다. 일단 관리인을 시설에서 내보내고 사건 경위서를 만들어서 법원과 경찰에 고소를 하고 피해 아동을 위한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육체적으로는 다른 이상이 없다는 진단결과를 받고나서 심리치료를 시작했는데 당황스런 상황이 생겨버렸습니다. “우린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이러면 5께짤(800원정도) 준다고 했어요. 그러면 우리도 좋다니까요.” 밝게 웃으면서 이리 말하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마음 한 구석이 먹먹했습니다. 그리고 상처가 더 이상 아프지 않는 “철사를 동여매도 아프지 않을”(이성복,죽음에 대한 각서) 죽은 나무가 떠올랐습니다.

 

두 남매는 사촌들과 다섯이 함께 지난 11월에 저희 집에 들어왔는데 첫 날부터 막부가내 싸움을 걸어오던 특별한 아이들이었습니다. 나누어 준 옷중에 스웨터가 맞는 것이 없어서 며칠 기다리라고 했더니 당장 내놓으라고 독기어린 눈과 중얼대는 욕 몇 마디로 제 속을 바득바득 뒤집어 놓았습니다. 꼭 험한 거리 여자들에게 붙들려 호되게 당한 느낌이었습니다. 법원 자료를 살펴보니 부모가 돈을 받고 8살 정도부터 이 아이들을 남자들 방에 순서대로 들여보냈다고 합니다. 아이들에게 이런 일은 살아가는 일이고 부모로부터 인정받고 칭찬받는 일이었던 거지요.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한 동안 이 아이들과 눈도 마주치지 못했습니다. 이 세상에 한 부분으로 살아가는 저 역시 저 아이들을 저리 만든 세상의 가담자 같은 느낌이어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모르는 과제를 두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까요. 아이들을 탓할 수도 아무 일 없다는 듯 괜찮다할 수도 없어서 그러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죽은 나무 같은 이 아이들에게 삶이란 가치를 가르칠 수 있을까요? 혹시나 사람들이 데려온 간음한 여인을 두고 몸을 숙여 땅에 무언가 쓰고 계셨다는 예수님의 마음도 이러했던 걸까요?

 

남자인 제가 나서는 것은 위험한 요소가 있을 수 있어서 원장 선생님과 봉사자 선생님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이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달라고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 길 밖에 떠오르지가 않습니다. 이 아이들이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싫어하는 것이라서 자기도 하지 않으려하는 마음을 심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행히도 아이들이 천사의 집에서 살아가는 걸 좋아하고 있습니다. 관리인이 사건이 발각될 것이 두려워서 아이들에게 100께짤(만오천원정도)을 주고 담장에 사다리를 가져다 놓고 도망가라고 그리도 부추기었는데도 이 아이들은 떠날 마음이 없었더라고요. 뭐 큰일도 아닌데 구태여 살기 괜찮은 여기를 떠날 필요를 못 느꼈던 거지요. 웃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그래도 아이는 아이라서 그 안에 세상이 다 뺏어갈 수 없는 맑음이 남아있을 것입니다. 지나가다 어깨를 건드리면 순간적으로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변하던 녀석이 요즘은 초콜릿과 사탕 몇 개에 먼저 달려와서 무어라 이야기도 하고, 그리 가고 싶었던 학교였는지 가방매고 학교 가는 일에 뿌듯해 하는 걸 보면 아이는 아이입니다. 죽은 나무지만 보이지 않는 뿌리는 그렇게 살아있으니 삼 년 정성스레 물을 주면 꽃이 피지 않을까요? 이 사순과 부활에 죽은 십자 나무에 매달려 있는 한 사람, 아름다운 꽃 한 송이 같은 한 사람을 바라보면서 그리 믿어보기로 하였습니다